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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신론자를 위한 종교 - 알랭 드 보통 <7/50>

무신론자를위한종교
카테고리 시/에세이 > 나라별 에세이
지은이 알랭 드 보통 (청미래, 201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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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랭 드 보통 책은 보통은 만족스럽다. 

그런데 이 책은 너무나 만족스럽다. 

읽고, 또 읽게 될것 같다. 


# 이 책의 핵심. 
신앙의 지혜는 온 인류의 것이며, 심지어 우리 가운데 가장 합리적인 사람들의 것이기도 하다. 따라서 초자역적인 것의 가장 큰 적들이라도 이를 선별적으로나마 다시 흡수해야할 것이다. 종교는 매우 유용하고, 효과적이고, 지적이기 때문에 신앙인들만의 전유물로 남겨두기에는 너무 귀중한 것이다. 
  

p28
  현대 사회에서 어떤 공동체에 들어가는 방법의 핵심에는 각자의 일에서의 성공에 대한 찬양이 놓여 있다. 어떤 파티에서 맨처음 받는 질문이 "무슨 일을 하십니까?"일 때에, 우리는 그 공동체의 출입문에 맞닥뜨렸음을 직감한다. 즉 이 질문을 받고 우리가 내놓는 답변에 따라서, 우리가 저 하찮은 작자들로부터 따뜻한 환영을 받을지, 아니면 결정적으로 버림을 받을지가 좌우되기 때문이다. 이처럼 경쟁적이고 사이비 공동체적인 모임에서는 우리의 속성들 중에서 겨우 몇 가지만 유효한 화폐가, 즉 낯선 사람의 호의를 구입할 수 있는 수단이 될 것이다. 우리의 명함에 무엇이라고 적혀 있는지가 무엇보다도 중요한 것이다. 평생 아이를 키운, 시를 쓴, 또는 과수원을 경영한 사람들이 있다면, 그들은 더욱 강력한 지배적 다수와는 반대되는 삶을 산것으로 간주되어 과소평가되더라도 어쩔 수 없다고 생각할 것이다. 
  이와 같은 수준의 차별을 고려해볼 때, 우리 중 상당수가 자기 일에 극진적으로 몰두하는 길을 선택한다는 사실은 그리 놀라울 것이 없다. 다른 것은 거의 모두 버리면서까지 자기 일에 집중하는 것이야말로 상당히 그럴듯한 전략처럼 보인다. 왜냐하면 지금의 세계는 일터에서의 성취가 곧 물리적 생존을 위한 경제적 수단을 확보하고, 나아가서 정신적 번영을 위해서 필수적인 타인의 관심을 확보한다고도 생각하기 때문이다.  
 

p152
  여기서도 우리는 실제로 흡수할 수 있는 것보다도 무한히 더 많은 자료를 다루게 되며, 우리에게 가장 중요한 것이 무엇인지를 파악하려고 노력한다. 21세기 초에 인문학에서 학위 과정을 이수하는 비교적 근면한 학부생이라면, 그는 졸업 때까지 800권가량의 책을 읽게 될 것이다. 이에 비해서 1250년에는 잉글랜드의 제법 부유한 가정에서도 책을 3권 가진 경우는 비교적 행운에 속했다. 이 소박한 장서 가운데 한 권은 성서였고, 또 한 권은 기도서였고, 또 한 권은 성인의 전기였다. 이 정도의 책값만 해도 웬만한 집 한 채 값에 맞먹을 정도였다. 혹시 우리가 책의 홍수 시대를 맞이하여 안타까워해야 한다면, 그것은 우리의 지능과 감수성을 발달시키는 최선의 방법은 단순히 더 많은 책을 읽는 것보다는 오히려 몇 권의 책을 여러 번 숙독하는 것임을 느끼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는 아직 읽지 못한 책들에 대해서 죄의식을 느끼자만, 실제로는 우리가 아우구스티누스나 단테보다도 이미 더 많은 책을 읽었음을 그만 간과하고 있다. 즉 우리는 책을 얼마나 많이 소비하느냐가 아니라, 오히려 책을 어떤 태도로 받아들이느냐가 문제의 핵심이라는 것을 너무 무시하고 있다. 
 

p200
  신(新)종교적 비관주의 철학의 논리가 보다 잘 드러나는 곳이 있다면, 바로 결혼 - 현대 사회에서 가장 슬픈 합의 가운데 하나라고 할 수 있는 - 일 것이다. 결혼이 실제 이상으로 끔찍한것처럼 표현되는 까닭은, 결혼이 원칙적으로는 행복을 위해서 이루어져야 한다는 세속의 놀라운 가정 때문이다. 
  기독교와 유대교에서는 결혼이 항상 즐거운 것만은 아니었다. 게다가 결혼에 대해서 불만을 품는 것은 뭔가 나쁘거나 부당하다는 식의 잘못된 인상 때문에 또다른 고통의 계기가 되었다. 기독교와 유대교는 결혼을 주관적 열성에 의해서 고무되고 지배되는 단순한 결합으로 간주하지 않았다. 대신에, 그리고 보다 적절하게, 개인이 사회에서 어른의 지위를 획득하는, 그리고 가까운 친구들의 도움을 받아 하느님의 인도를 받으며 다음세대를 기르고 교육하는 메커니즘으로 간주했다. 이처럼 기대가 제한적일 경우, 다른 어딘가에 보다 강렬하거나 아름답거나 또는 덜 위험한 대안이 있을지도 모른다는, 세속 사회에서는 매우 친숙한 의구심을 압도하게 된다. 종교적 이상 속에서는 마찰이나 논쟁이나 권태가 오류의 상징이라기보다는 오히려 계획에 따라서 진행되는 삶의 상징이다. 
  실용적인 접근 방식에도 불구하고, 종교는 열정적으로 애모하고 싶어하는 우리의 욕망을 분명히 인식했다. 그리고 우리에게 다른 사람을 믿을, 다른 사람을 숭배할, 다른사람에게 봉사할, 다른사람에게서 우리에기는 없는 완벽함을 찾아낼 필요가 있읆을 알고 있다. 종교는 이런 애모의 대상이 인간적인 것이 아니라 오히려 항상 신적인 것이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 인간은 상대적으로 단조로우며 결점이 많은 피조물이기 때문에 용서와 인내의 대상이라는 사실을 매일같이 우리에게 상기시켰다. "왜 당신은 더 완벽하지 못하지?" 이 질문이야말로 다수의 세속적 논쟁의 밑에 깔려 있는 격앙된 질문임에 틀림없다. 우리가 손상된 꿈 때문에 서로 언쟁을 벌이는 일을 막기 위해서 우리에게 경배의 대상인 천사와 관용의 대상인 연인을 마련해준 것만 봐도, 신앙은 건전한 판단력을 가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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